Hangarom
우연히 통의동 보안여관에 들렀지 본문
2024.12.21.
최고/최저 기온 2° /-5°
눈, 흐림
아침에 눈을 뜨니 창밖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모처럼 뚜벅이로 밖에 나서려다가 외출 직전에 마음이 바뀌어 바이크를 타고 나섰다. 길을 보니 인도로 걸었더라면 오히려 더 위험했을 뻔 했다. 장담하건대 그랬다면 난 분명 넘어졌을거다. 맨 바닥에서도 잘 넘어지니 말이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가려던 길이 집회로 막혀 우회하던 중, 우연히 통의동 보안여관이 눈에 띄었다. 이전에도 몇 번 스쳐 지나간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충동적으로 바이크를 세우고 들어가 보기로 했다.
통의동 보안여관은 과거 여관 건물을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곳으로 전시 및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리는 곳이라고 한다. 지나칠 때마다 상시 열려 있는 문이 마치 행인의 발길을 유도하는 듯했는데 오늘은 결국 그 유혹에 내가 홀리고 말았다.
살이 그대로 드러난 내부 공간은 분리된 듯하면서도 연결되어 있어, 전시 공간을 주제별로 나누는 동시에 하나로 통합시키는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공간 자체가 너무 개성을 발휘하는 곳에서의 작품 관람을 그리 선호하는 편은 아니다. 공간의 매력이 작품을 압도하다 보니, 정작 작품을 감상하기보다는 공간을 탐색하는 데 더 많은 시선과 시간을 쏟게 되었다.
전시되어 있는 작품을 마주했을 때, 완성도의 측면에서는 솔직히 그리 좋다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전시에 대한 설명을 읽고 나서 조금은 관심이 생겼던 이유는 작가는 한때 말을 잃었던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퍼포먼스와 시를 주요 작업 매개로 삼아 하나의 작품으로 엮어낸 만큼, 언어와 시는 작가에게 중요한 창작 도구였다. 이 드로잉들 속에는 한때 잃어버렸던 언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작가의 회복 과정을 암시하는 듯 했다.
언어를 잃은 경험은 없지만, 말을 전할 때 주저함과 머뭇거림, 그래서 결국 나아가기를 포기했던 시기를 겪은 적이 있어 조금은 공감이 됐다. 여전히 머뭇거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끄적이려고 노력하는 지금의 나도 어쩌면 회복해가는 과정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각 방향으로 난 창문 밖 풍경이 무척 아름다웠다. 고정된 프레임 너머로 계절마다 변하는 풍경이 이 공간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가장 멋진 작품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 2층에는 신관과 연결된 통로가 있었다. 밖에서 볼 때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통로를 통해 옆 건물과 이어진 공간임을 알게 되었다.
신관에서는 서점, 카페, 전시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서점 코너에서는 독립출판물, 예술서적, 문학서적, 그리고 다양한 굿즈가 판매되고 있었다.
제목에 사로잡힌 책. 나의 현재 마음이 투영된 듯했다. 나를 소모하는 것들로부터 달아나고 싶다. 제발. 작가처럼 나 또한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사람으로서 책은 되도록 도서관에서 빌려보는 편이라 구입은 하지 않았다.
아기자기하고 감각적인 크리스마스 굿즈들. 어렸을 땐 친구들과 크리스마스 카드를 나눠갖곤 했었는데 요즘은 영 분위기도 안나고 하니, 올해는 좋아하는 이들에게 카드를 건네보면 어떨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의외로 이런 이벤트를 꽤 좋아하는 편.
한국의 산 정상에 있는 비석들을 모아 만든 포스터가 있었다. 또 다른 버전으로는 비석 이름 위에 스티커를 붙이는 포스터도 있었는데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꽤 매력적으로 보일 것 같았다. 나는 해당되지 않지만.
백두산 천지 지도인데 귀여워!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걸까?
1층 카페에서는 갓 구운 스콘 냄새가 코를 찌른다. 스콘은 정말이지 냄새부터가 맛있다. 건강검진을 위해 식이조절 중이라 그런지 그 유혹적인 냄새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스콘 냄새를 피해 지하 1층 전시공간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집중력이 떨어져서 작품들을 그저 쓰윽 훑어보는 데 그쳤다.
앗! 이건 이스터에그? 못 보고 지나칠 뻔 했다.
지하 2층의 전시공간. 땅 아래 집 터를 그대로 보존해두었는데 터를 덮고 있는 유리가 마치 잔잔한 수면 같았다. 작품이 수면 위에 비친 듯이 연출되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음에 들었던 작품 두 점. 언뜻 보면 툭툭 쳐낸 듯한 느낌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교함이 돋보인다. 시원하게 생략한 듯하면서도 필요한 부분에는 적절한 무게감이 실려있어, 기술적으로도 매우 잘 그린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공간 탐험을 마친 후 밖으로 나왔다. 손이 시려워 사진을 찍는 것조차 망설여질 만큼 추운 날씨였는데 바로 옆 공원에서 음악 공연을 하는 연주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손이 많이 시려울 텐데도 다들 웃고 계셨다. 사진을 찍는 순간엔 그저 놀라움뿐이었는데 지금 이렇게 글을 쓰며 그 사진을 다시 보고 있자니 묘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작고 기분 좋은 이야기 몇 개 엮고 나니 하루를 근사하게 보낸 것 같다. 언젠가 또 힘에 부쳐 감정이 자꾸 아래로 가라앉으려 할 때, 작은 것에서 좋은 것을 찾아내는 이 감각을 꼭 다시 떠올려야겠다. 이 감각만은 잊지 말자.
'일상의 조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장호수 겨울 산책 (0) | 2024.12.08 |
---|---|
국립민속박물관 파주 (1) | 2024.12.01 |
인천대공원 늦가을 산책 (1) | 2024.11.24 |
하늘공원 산책 (0) | 2024.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