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유의 확장

[전시] 순간이동-국립현대미술관 서울

by 한가롬 2024. 12. 11.

2024.11.17.

하늘은 파랗고 은행나무는 샛노랗게 물든 날이었다. 모처럼 일 없이 맞은 여유로운 일요일, 삶의 의욕을 되살리고 정서적 충만감을 느끼고 싶었다. 그런 이유로 전시를 관람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자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았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여러 전시가 진행 중이었고 사전 정보 없이 방문한 터라 즉흥적으로 관람할 전시를 선택했다. 내가 선택한 전시는 '순간이동'. 전시 제목과 포스터만으로는 내용을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그 모호함이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했다.

 

 

로비에 '이강소: 풍래수면시' 작품 일부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 앞에 있던 거울에서 내 모습을 담았다.

 

 

전시관 입구에서 전시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전시 '순간이동'은 국립현대민술관과 캐나다 국립영상위원회가 협력하여 제작한 전시라고 한다. 낯설게 느껴졌던 캐나다 국립영상위원회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주요 업적이 담긴 글이 함께 적혀 있었다.

 

 

관람에 앞서 VR 작품별 관람 유의사항에 대한 안내가 있다. 이를 통해 VR로 관람하는 전시임을 알게 됐다.

 

 

첫 번째 작품은 김진아의 <미군 위안부 3부작>으로, '동두천', '소요산', '아메리칸 타운' 세 개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분단 이후 미군 주둔지의 기지촌과 미국 위안부의 삶을 담고 있다. 영상은 실제로 미군 위안부들이 거주했던 집 내부와 주변 환경을 보여 주고 있었는데 인간의 존엄이 철저히 배재된 곳으로 너무나 위태로워 보여서 보는동안 가슴이 저릿했다. 

 

 

3부작 중 하나인 '소요산'은 미국 기지촌이 위치했던 동두천의 산으로, 그곳에는 미군 위안부 중 신체 검사에서 이상이 발견된 여성들을 격리 수용하던 '낙검자 수용소'가 있었다고 한다. 수용소의 환경은 너무도 열악하고 처참해 탈출을 시도하던 여성들이 옥상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잃는 비극도 있었다고 한다. 작품은 AR 기술을 통해 당시 수용소의 외경을 구현했으며 전용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하면 이 역사적 공간을 가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두 번째 작품은 타일러 헤이건의 <시밀카민 교차로>로, 브리티시 컬럼비아의 시밀카민 지역을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는 캐나다 서부에 위치한 주로,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풍부한 농업자원으로 유명하며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전부터 원주민의 삶의 터전이었다. 이 작품은 선주민과 유럽계 이주민 사이에서 벌어진 출동과 마찰을 다루며 시밀카민 교차로에 위치했던 세인트 앤 카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캐나다 연방 정부는 1900년대 초부터 가톨릭 교회 등을 통해 선주민 아동을 위탁받아 훈육하는 제도를 시행했다. 이 과정에서 선주민의 언어와 문화를 말살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고 신체적·성적 학대 사건이 빈번히 발생했다. 2021년 캐나다 곳곳에서 선주민 아동의 집단 무덤이 발견되면서 심각한 인권 침해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에 대한 분노로 세인트 앤 카톨릭 교회를 포함한 여러 교회가 방화로 소실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면 전시되어 있던 영상을 관람할 수 있다. 처음에는 다큐멘터리를 사전 배경 지식 없이 보았기에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작품을 다시 정리하며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 뒤에야 그들의 이야기를 마음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https://transporttoanotherworld.kr/

 

시밀카민 교차로

공간, 신앙, 정체성이 교차하는 인터랙티브 포토 에세이

transporttoanotherworld.kr

 

 

 

세 번째 작품은 김경묵의 <5.25㎡ >로, 작가가 평화주의 신념에 따른 병역 거부로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석방되기까지 머물렀던 독방에 대한 경험에 기인하여 만든 작품이다. 2020년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에게 대체복무가 허가되기 전인 2015년, 작가는 자신의 신념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했고 결국 실형을 선고받았다. 

 

 

<5.25㎡ >는 실제 크기로 제작된 독방 속에서 VR을 통해 작가가 경험했던 독방의 모습을 재현했다. VR 관람 시간에 제한이 있어 가상 공간은 체험하지 못했지만, 독방 내부는 관람객이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어 그 제한된 공간에서의 감정과 분위기를 간접적으로나마 체감할 수 있었다.

 

 

그보다 더 인상 깊었던 것은 감옥에서 주고받은 서신들이었다. 서신 중 한 구절에서 작가는 '자발적 고독'과 '강제적 고립'의 차이를 언급하며 후자야말로 진짜 처벌이라고 표현했다. 그 문장을 통해 옥살이를 하며 느꼈을 작가의 깊은 절망감과 고립의 무게가 생생히 전해졌다. 

 

 

다음으로 접한 작품은 권하윤의 <구보, 경성방랑>이었다. 이 작품은 1934년 경성을 거니는 지식인의 일상을 담은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 유행했던 '만문만화' 캐리커쳐 형식으로 인물과 풍경을 묘사했다고 한다. '만문만화' 형식이란 뭘까? '만문만화'란 만화와 글이 결합된 독특한 서사 형식으로, 만화와의 차이점은 텍스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만화적인 그림 요소를 더한 점이다. 텍스트가 이야기의 주요 매개체로 활용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일러스트와도 구별되며, 글과 그림이 조화를 이루어 서사를 풍부하게 표현하는 형식으로 보인다.

만문만화-꼬리 피는 공작(안석영, 조선일보)

 

이 작품 또한 VR 체험이 가능하다. VR 관람은 시간별로 정해진 일정에 따라 진행되는데 시간을 맞추지 못해 직접 체험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벽면에 상영된 영상만으로도 작품의 분위기와 내용을 어느정도 감상할 수 있었다.

 

 

다섯 번째 작품은 제이슨 레그, 더크 반 깅켈, 그리고 일본계 캐나다인 소설가 조이 코가와의 협업으로 제작된 <록키 산맥의 동쪽>이다. 이 작품은 조이 코가와의 소설 '숙모'와 '언젠가'를 바탕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캐나다의 일본인 공동체의 삶을 다룬 게임 형식의 작품이다. 관람객은 게임을 통해 갑작스럽게 수용소로 강제 이주를 당했던 소녀 유키와 그녀의 가족, 그리고 이웃들이 겪은 이야기를 체험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일본은 전범국가로서 국민 전체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군국주의와 식민지 정책을 통해 경제적 수혜를 누린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패망 이후 개인의 어려워진 삶을 다루는 이야기에 쉽게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조성된 환경 속에서 풍파를 겪었을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춰 작품을 감상하려고 노력했다.

 

 

여섯 번째 작품은 유태경의 작품으로, 1907년에 개관한 종로의 '단성사' 옛 모습을 가상공간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흥미롭게도 가상공간으로 재현한 단성사에서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성영화 '근로의 끝은 가난이 없다'를 상영하는 작품이다. 실제로 VR로 체험했다면 더 몰입감 있게 즐길 수 있었을 작품이지만 아쉽게도 체험 시간이 맞지 않아 VR 감상을 하지 못했다.

 

 

일곱번째 작품은 랜달 오키타의 <거리의 책>이라는 작품이다. 랜달 오키타는 앞서 보았던 <록키 산맥의 동쪽>처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일본이 패전국이 되면서 일본계 캐나다인인 조부 요네조 오키타가 겪었던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패전국 국민이 감당할 아픔에 공감하기 어려웠던 내 시각이 이 작품을 통해 조금씩 변화함을 느꼈다. 국가의 통수권자나 정치가 잘못되면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것은 결국 국민이다. 이는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이 마주하고 있는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이 작품 또한 VR을 통해 마련된 공간에서 가상 체험이 가능하다. 비록 VR 체험을 하지 못했지만, 체험 없이도 작품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마지막 작품은 리사 잭슨의 <비다반: 첫 번째 불빛>으로, 도시가 자연으로 뒤덮인 미래의 공간을 그려낸 가상현실 영화다. 이 작품은 VR로 직접 체험했는데 웅장한 스케일과 초현실적인 공간이 환상적으로 묘사되어 몰입도가 매우 뛰어났다. 토론토의 나단 필립스 광장과 지하철 역내가 식물과 물로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이는 마치 인류 멸망 후 자연이 지구를 되찾은 모습을 그리고 있는 듯했다. 현대의 익숙한 언어 대신 웬닷어, 모호크어, 오지브웨이어 등 선주민의 언어가 내레이션으로 사용되었으며 이로 인해 새로 시작을 맞이한 지구의 모습을 체험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작품은 단순히 시각적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고 자연과 문명에 대한 성찰을 불러일으켰다.

 

 

총 8개의 작품을 감상하며 마치 8번의 전시회를 다녀온 듯한 인상을 받았다. 8팀의 작가들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지만, 시간과 공간을 매개로 관객의 체험을 유도하며 '순간이동'이라는 전시 주제를 연결시켰다. 이는 전시의 기획력이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전시는 다양한 주제를 화두로 던지며 관객에게 깊은 사색의 여지를 남겼다. 그만큼 생각할 거리가 많아 작품들을 온전히 소화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 과정 자체가 매우 의미있고 인상적인 경험으로 남았다. '순간이동'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유의 여정을 안겨 준 특별한 전시였다.

 

 

 

 

 

'사유의 확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서] 가재가 노래하는 곳 | 델리아 오언스  (1) 2025.02.03
[독서] 더블 | 정해연  (0) 2025.01.21
국립민속박물관 파주  (3) 2024.12.01